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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철도 비밀노트–12화] 통일경제 도약의 힘찬 기적소리
-개성공단을 향한 화물열차 정기운행의 기록

양정규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8/17 [09:00]

[북한철도 비밀노트–12화] 통일경제 도약의 힘찬 기적소리
-개성공단을 향한 화물열차 정기운행의 기록

양정규 객원기자 | 입력 : 2021/08/17 [09:00]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남측 문산역과 북측 봉동역을 오가며 개성공단 화물을 실어 날랐던 경의선 남북화물열차는 2007년 12월 11일부터 약 11개월간 주말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1회씩 운행됐다.

 

화물열차 운행이 시작될 무렵엔 개성공단이 활성화되길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철도수송은 비용면에서 기존 선박수송에 비해 80% 정도의 물류비가 절감되고 수송시간도 대폭 단축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철도를 통해 남북경제협력이 확대되고 한반도 종단철도가 완전히 복원된다면 대륙철도로 나아갈 미래가 훨씬 선명해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남북화물열차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1년도 채 안 되어 중단되어 버린다.

 

▲ 남측 문산역과 북측 봉동역을 오가며 개성 공단 화물을 실어 나를 경의선 화물 열차가 도라산역에서 북측 판문역을 향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 국토매일

 

희망과 안타까움이 공존했던 남북화물열차의 역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있다.

 

남북화물열차의 차장차에 올라 남북을 오갔던 권은영님과 기관사 김재균님이 그들이다.

 

매일 운행되던 화물열차에 올라 남과 북을 오갔던 실무자들은 그 당시를 어떻게 회고할까? 부푼 기대와 희망을 안고 북측 실무자들과 나눴던 이야기 또는 아찔했던 순간들로 함께 돌아가 보자. 

 

현재 일산승무사업소 부소장으로 계신 권은영님은 차장차에서 열차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인물이다.

 

차장차란 화물칸 뒤의 차에서 화물을 감시하는 사람이 타는 차를 일컫는다.

 

권은영님의 경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화물열차 차장차 전담을 했다.

 

당시엔 10년차 정도의 대리급 직원이었으며 도라산역 근무할 당시 근무 패턴과 남북화물열차 주기와 맞아떨어져 담당이 된 케이스다.

 

열차에는 기관사 2명과 차장 1명, 그리고 차가 고장 났을 때 고치는 임무를 가진 검수원 1명이 탔는데 전체를 통일부에서 총괄했고 통일부의 남측열차사무소 주무관과 사무관도 번갈아 가며 함께 탑승했었다.

 

▲ 남북화물열차는 2007년 12월 한달간 28회(편도 기준) 운행하면서 총 219.5톤의 철도화물을 수송하였다.  © 국토매일

 

처음 차장차를 타기 전엔 통일부에서 미리 정신교육 등을 해줘서 마음의 준비는 할 수가 있었지만 사실 긴장되고 무서운 마음은 숨기기 어려웠다.

 

교육 받았던 사항 중 특이했던 것 중 하나는 북한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남한과 북한을 일컬어 ‘남한’, ‘북한’ 이라고 지칭하면 안되고 ‘남측’, ‘북측’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도 우리를 남조선으로 부르지 않고 남측이라 불렀다. 서로의 체제를 주장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다.

 

도라산에서 개성 판문역까지는 약 7.3km 거리로, 20~3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곳 역시 남과 북의 분계선만 없다면 언제라도 금세 다녀올 수 있는 우리나라 국토라는 게 실감 났다. 북한의 기념일을 제외하고는 평일 오후 2시면 매일 하루 한번 북을 향해 출발했다.

 

남측 맨 북쪽 민간인 마을인 ‘대성동 마을’을 지나 북측 맨 남쪽 민간인 마을인 ’기정동 마을’로 가다보면 북한 초소 군인들은 우리를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북측의 인공기는 남측의 태극기보다 훨씬 더 컸다.

 

또 사천강을 지나다 보면 물이 항상 말라 있었다. 강인지 냇물인지 모를 정도로 황량해 보였다. 바깥으로 보이던 산들도 사계절 내내 나무도 없는 벌거숭이산이 대부분이었다.

 

남북화물열차 정기운행을 시작했던 2007년 12월에는 컨테이너 22박스 정도 수송했던 것 같다.

 

주로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물건들이었는데 남한 기업의 물건들을 북한 노동자들이 생산한 작업화, 그릇, 냄비, 교복, 문구류, 시계, 쥬얼리, 신원에벤에셀 숙녀복 등이 주를 이뤘다.

 

▲ 남한에서 북한으로의 물동량은 180톤, 북한에서 남한으로의 물동량은 39.5톤이었으며, 주로 개성공단 관련반출입 물자와 대북 식량지원 물자를 수송하였다.  © 국토매일

 

열차로 분계선 넘어가는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열차출발 2일 전 군사분계선 출입통행계획서를 남측 열차운행사무소에 통보하고, 열차출발 1일 전 철도차량 출발·도착보고서를 작성하여 열차출발 당일 세관에 제출한 후 국제화물송장을 근거로 화물인수인계서 등을 작성하는 일이 낯설었다.

 

출발 한 두 시간 전부터 수속을 밟고 서류 준비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코레일 남북철도사업단에서 틀을 잡아주어 출입통행 및 통관검사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북한 말과 남한 말이 달라 서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녹색등을 풀색신호, 장내신호기를 맞이 신호기라고 했다. 초기엔 서로 말이 안 통해 손 짓 발 짓을 해가며 애를 먹기도 했다. 

 

사실 편의성만 따지자면 열차를 이용해 물자를 운송하는 것 보다는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당시 화물열차의 활성화를 위해 직접 업체 관계자를 만나 마케팅 활동을 했지만 실익을 따지며 호응이 없었다.

 

설득을 하러 다니기도 했는데 개성공단 입주 업체들 중에는 비용면에서 철도보다는 기존의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가진 업체가 적지 않았다.

 

도로로 가면 더 편리한데 철도로 하면 컨테이너를 옮기기 위해 지게차로 옮기고 또 차로 옮겨야 하니까 철도는 좀 효율성이 없다고들 했다. 봉동에서 개성공단까지 철도가 바로 연결돼있지 않아 추가로 물류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다.

 

▲ 남북화물열차가 마지막으로 판문역을 출발하여 도라산역에 도착하자 취재진들이 몰려들어 취재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화물열차 개통으로 개성공단이 활성화되고 철도를 통한 남북경제협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었으며 나아가 한반도종단철도의 완전한 복원을 통해 대륙철도 시발점이 되는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편의성면에서 컨테이너를 또다시 지게차로 옮기고 차로 또 옮겨야하는 등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업체의 참여율이 저조해 물동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 국토매일

 

업체 참여가 저조했던 탓에 우리는 기대와는 달리 실어날라야 할 물동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엔 오봉에서 시발해서 북한까지 컨테이너 10량을 싣고 운행하기로 했었지만 물동량이 많지 않아 나중에는 기관차와 차장차만 오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쪽에선 남북철도의 미래를 위해 빈 열차로라도 계속 철도를 이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분단 이후 어렵게 얻은 화물열차 정기운행의 기회를 단순히 북한만 왔다 갔다 하는 화물열차 운행에 그치지 않고 추후 대륙을 넘어 유럽까지 가는 게 목표였으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남한과 북한은 2008년 1월 25일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군사 실무회담을 가진 적이 있었다.

 

북한은 이 자리에서 화물열차의 운행 횟수 감축을 제안했다. 한반도 분단 반세기만에 남북한을 잇는 화물열차가 역사적인 개통식을 가진지 불과 한달 여 만의 일이었다.

 

북한측 단장인 박림수 대좌가 회담에서 짐도 없이 빈 열차로 오갈 바에는 차라리 운행을 줄이는 게 낫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남측 대표단은 철로의 안정화와 물류 기반 확충이라는 차원에서 정기 운행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히며 북한의 제안을 거절했다.

 

운송할 화물이 있든 없든 일단 갔다. 운행 기간 중 화물을 싣고 간 게 사실 열 번도 채 안되었다.

 

정기운행 첫날이나 통일부 장관이 나오는 날엔 급하게 통일부 산하에 있는 도라산역 남북출입사무소의 장관이 현대아산에 직접 부탁해 화물을 일부러 만들어 간 적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우리측 기관사는 고정기관사 4명에 지도팀장이 한 사람씩 붙었다.

 

한 분은 북한이 고향인 분을 상징적인 분을 뽑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대표로 기관사를 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측 기관사님들이랑 북측 사람들이 많이 친했다. 북측 기관사들이 남측 기관사님들을 통해 화장품이나 샴푸 같은 걸 부탁하기도 했다.

 

단지 북한의 여직원들과는 차단을 시켜놔서 말을 한 번도 섞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당시엔 통관수속도 까다로웠다. 수속 절차도 복잡했고 세관검사도 철저히 했다. 사소한 신문쪼가리조차 서로의 것을 가지고 오면 난리가 났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사상관련한 책이나 신문 등의 물건이 있는지 검사를 철저히 했는데 하필 바람이 세게 나오던 기관사실의 천장 구멍을 북측의 신문지로 막았던 것이 화근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상 관련해서는 까다로웠지만 김재균기관사에 따르면 점심 도시락으로 먹기 위해 가져간 라면이나 음료수 같은 먹거리는 북측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에 훌륭한 도구였다고 한다.

 

함께 밥을 먹다가 박카스나 원비디 같은 음료수를 건네주면 그렇게 좋아했다. 혼자 있을 땐 슬며시 주머니에 넣었다. 아마도 가족에게 맛보여줄 생각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을 땐 의심받을 것이 두려워서인지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마셔버리거나 잘 받지 않았다. 어떤 북측 실무자는 “아이고 배부릅니다. 우린 맨날 이팝(쌀밥의 함경도 사투리)에 소고기 먹습네다.” 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매일 보는 사이라 만나면 반가웠지만 나눌 수 있는 대화에도 한계가 있고 조심스럽다 보니 비는 시간엔 마땅히 할 게 없었다.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바로 배구나 탁구, 축구 등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남측 기관사 사무소에 가면 탁구, 배구 동호회가 있었는데 사정을 이야기하니 동호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걷어 운동 도구들을 열차에 실어줬다. 배구공 3개, 축구공 2개, 탁구공에 탁구대까지 화물열차에 싣고 갔다.

 

함께 운동하고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이면 간 김에 눈도 쓸어주고 살갑게 대했더니 북측 사람들은 김재균 기관사가 오면 “재균동지 왔어?” “큰형님 최고다”라고 하며 반가워 했다.

 

▲ 처음 보았을 땐 외모와 말투조차 낯설었지만 매일 판문역에서 만나 농담도 하고 봉지 커피도 마시면서 정들었던 북측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이제 그립다.  © 국토매일

 

노무현 정권이 끝나갈 무렵엔 새로운 대통령으로 누가 뽑힐 것인가에 대해 북측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북측 사람들은 “이번엔 대통령이 누가 될 것 같은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며 우리를 떠봤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어 말을 딴 데로 돌리곤 했다.

 

김재균기관사는 그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주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한다.

 

김기관사가 먼저 “날도 좋은 데 뭔 그런 이야길 해요. 어릴 적 이야기나 합시다. 나 어릴 적엔 진달래도 먹고 회충약도 먹고 그랬는데 그쪽은 어땠소?” 하니 당시 남북철도 담당으로 파견된 공산당원 함철호라는 이가 “난 회충 13마리 있었는데 그게 코로 나왔어.” 라고 하며 깔깔 웃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기가 신고 있는 신발을 가리키며 이거 당에서 준거야, 라며 장난도 쳤다. 개구리 뒷다리 구워 먹은 이야기며 뱀 잡아 먹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민감한 이야기를 피해 한 민족으로서의 공통점을 확인하는 식으로 대화를 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함철호라는 이가 남측과 북측 사람들이 만나 혹시 위반하는 사항은 없는지 감시하는 역할로 나온 정보부 최고 직원이었을 거라는 말이 있었다.

 

판문역에서 나가면 개성공업지구가 있는데 외곽에 봉동관이라는 쇼핑센터 겸 식당이 있다.

 

주로 우리측 기관사와 북측 기관사, 통일부 요원이 함께 평양에서 내려온 철도성 담당자와 경실련같은 민화협 북한의 정보부의 직원으로 보이는 북측 인사와 합석을 했다.

 

그곳은 북한의 전통술과 북한 제조술, 버섯, 그림, 조금은 조잡스러워보이는 소품 지갑 등도 팔고 있었다.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전통음식은 당시 일인 당 약 30달러였는데 한끼 식사 치고 꽤 비싼 가격이었는데 통일부 직원과 같이 가면 20달러에 깎아주기도 했다.

 

음식은 남한과 분위기 자체가 달랐는데 특이했던 반찬은 꿩으로 된 음식과 하얀 백김치였다. 쇼핑 품목 중엔 상황버섯이 특히 인기였는데 천연인데다 커다란 한 봉지에 10달러 정도로 저렴했다. 그 외에도 대동강 맥주나 뱀술도 팔았다.

 

노무현정권때만 해도 훈풍이 불던 남북철도는 그러나 2008년 2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여느 때처럼 임무 수행을 위해 북측에 갔는데 우리측 통일부 직원을 향해 “송선생은 다음부터 오지 마세요.”라고 하며 막무가내로 통보했다.

 

어쩔 수 없이 통일부 직원이 했던 일까지 권은영님에게 넘어왔다. 화물차도 없으니 다음부턴 검수원도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기관사 2명과 차장 1명 이렇게 3명만 열차에 올라 운행하였다.

 

금강산관광을 하다 해변에서 북한군 총에 맞는 사고가 일어난 다음부터는 개성공업지구로 나가는 것도 북측이 불허했다. 

 

평화로웠던 시절에는 스타렉스 같은 다인승 차량을 이용해 바깥으로 나가 식사도 하고 쇼핑도 할 수 있었지만 판문역 안에 머무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제한되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곳 판문역에서 손수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북측에 가서 활동할 수 있는 게 적어지고 자주 공차로 가니까 지겨울 정도였다.

 

권은영님은 그래도 남북화물열차가 매일 오고 갔던 그 기간만큼은 남과 북이 수시로 만나 이야기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권은영님의 경우 북한을 가느라 생긴 출입국기록이 83회나 된다. 지나고 나서 이제야 생각해보니 언제 또 우리가 그토록 지겹다고 느낄 정도로 북한을 자주 갈 수 있었을까 라는 후회도 남는다.

 

함께 탁구 치며 농담도 하고 봉지 커피 마시며 즐거워했던 북측 사람들. 처음 보았을 땐 우리와 외모조차 달라보였다. 

 

먹는 게 다르고 기후도 다르니까 외모나 체형도 다 다른 것 같았다. 말투도 다르고 사용하는 용어도 달라 한민족이라는 게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민족으로서 언제까지 이처럼 따로 살면서 적대적으로 살아야 할까. 이러다 아예 다른 인종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 마지막 화물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2008년 11월 28일 문산~봉동 구간의 경의선 화물열차는 11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 국토매일

 

2008년 11월 28일. 마지막이 되어 버린 그날을 기억한다.

 

우리측에서 역장님도 함께 가는 걸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 승무날 담당 기관사로는 황해도 평산이 고향인 기관사인 신장철님이, 차장으론 권은영님이 배정됐다. 가져다 놨던 물품도 챙겨왔다.

 

탁구대 같은 큰 물품은 나중에 혹시 또 올 수도 있으니 그냥 놔두고 가겠다 했지만 북측 사람들은 그냥 싹 다 가져가라고 했다. 1년 가까이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하며 정들었던 사람들인지라 다들 울컥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같은 민족인데 오늘 가면 언제 또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다 정리하고 남으로 출발하려다가 권은영님은 북측의 석영철 소장이라는 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북화물열차가 재개통되면 내가 꼭 첫 번째 승무원으로 지원해서 올 테니 당신도 평양에서 내려와 그때 꼭 만납시다.”

 

북측 석영철 소장은 북한철도에 대해 교수님처럼 잘 가르쳐주던 젠틀한 북측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18년에 북측으로 여객열차 운행할 일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땐 권은영님이 담당이 아니어서 다른 분이 갔다고 한다.

 

실무협의하는 곳에서 석영철 소장이 “권은영 선생님 잘 계신지요?” 하며 안부를 물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동적이다.

 

10년도 훨씬 지난 그때까지도 이름을 기억해줬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권은영님은 남북화물열차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회고하며 이렇게 마무리했다.

 

“새벽에 빈 차로 출발해 손님들을 가득 싣고 다시 떠나가듯이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빈 차여도 계속 달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회가 다시 온다면 다시 북으로 가는 화물열차에 올라타 가보고 싶어요.”

 

통일경제 도약을 꿈꾸며 힘찬 기적소리를 울리던 그 날의 소리가 지금도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 굳게 닫힌 통문. 2008년 2월 ‘비핵 개방 3000’을 내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관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북한은 그해 12월1일 개성공단 육로 통행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개성공단 상시 체류 인원을 880명으로 줄이고 출입 횟수, 하루 출입 인원도 대폭 제한했다.  © 국토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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