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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철도 비밀노트–13화] 남북이 함께 대륙으로 뻗어나갈 꿈을 키우다

양정규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8/31 [08:30]

[북한철도 비밀노트–13화] 남북이 함께 대륙으로 뻗어나갈 꿈을 키우다

양정규 객원기자 | 입력 : 2021/08/31 [08:30]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을 시작할 무렵이던 2000년과 2002년 당시만 해도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은 금방 현실이 될 것처럼 보였다.

 

약 7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부산에서 프랑스까지 기차로 여행을 갈 수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을 지나 신의주와 단둥을 거쳐 하얼빈과 모스크바, 파리를 연결하는 철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 여행길에 오른 것으로 유명한 나혜석도 외교관 남편 김우영을 따라 1927년 서울역을 출발해 기차를 타고 프랑스를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 역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남북철도사업은 수시로 중단됐다.

 

순조로운 진행을 거듭하던 북한철도 현대화 사업 역시 재원 문제와 거듭되는 돌발 상황에 부딪혀야 했다.

 

급기야 1년여간 지속 되어 왔던 경의선 남북화물철도 정기운행마저 2008년 중단되었다. 북핵 위기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내외 정치적 환경의 영향 등이 주된 요인이었다.

 

▲ 남북철도 사업은 국내외 정치적 환경에 따라 수시로 중단됐지만 우리 통일부와 철도관계자들은 대륙으로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 국토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통일부와 철도관계자들은 대륙으로 뻗어 나가고자 하는 꿈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수많은 협의와 점검을 통해 재정비해 놓은 철길과 신축 또는 리모델링한 철도역 등이 있었고, 결심만 한다면 언제라도 남과 북이 함께 대륙으로 뻗어 나갈 수 있을 만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륙철도가 연결되어 남북철도가 운행된다면 남과 북의 경제에 미칠 경제적 이익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유럽 등 대륙으로의 대륙연결 통행료 수입을 확보하는 등 섬 아닌 섬나라로 살아온 남측에게는 북방경제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나아가 남과 북이 함께 동북아 물류중심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북한철도의 아버지라고도 불렸던 김일성은 철도에 대한 기대가 유난히 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는 남북한 철도연결을 통해 남북공동 이익 창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자주 표시하였다고 한다.

 

▲ TSR 시범 운송 장면. 대륙철도 연결에 북한이 더욱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북한철도의 아버지라고도 불렸던 김일성의 유훈사업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 국토매일

 

때문에 북에서 ‘철도성’이라는 조직은 북한 주민들의 리스펙을 받고 있는 아주 강한 조직이다.

 

우리는 주로 도로를 이용해 물류를 처리하지만 북측은 도로보다 철도가 더 많고 많이 활용되는 편이다. 궤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대라는 군대조직까지 갖출 정도니까 말이다.

 

북한이 대륙철도 연결에 적극적이었던 건 김일성의 유훈사업이었기 때문이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북측은 무슨 일인지 러시아와 일을 진행하면서도 우리와 함께 하는 것에는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북한을 상대로 한 철도외교 덕분에 북측이 태도를 바꾼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나진-핫산 프로젝트는 TKR-TSR 연계시범사업으로 부산-나진-하산-TSR로 연결되는 물류사업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당시엔 TKR-TSR연계사업이 단순 구상단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에 합의 후 2004년 모스크바에서 남·북·러 3자 철도 전문가 회의가 열린 데 이어 7월엔 북·러간 나진-핫산 철도 구간 현대화 합의가 이뤄졌다.

 

9월엔 노무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철의 실크로드’ 사업이라고 명명되었는데 2006년 3월 블라딕보스톡에서 TKR-TSR 연계사업 협력방안에 대해 남-북-러 철도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결국 합의가 됐다. 

 

▲ 좌로부터 북한의 김용삼 철도상, 러시아 국영철도공사 야쿠닌 사장, 남한의 당시 한국철도공사(현 코레일) 이철 사장.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2006년 3월 블라딕보스톡에서 TKR-TSR 연계사업 협력방안에 대해 남-북-러 철도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결국 합의가 됐다.  © 국토매일

 

2007년 6월에는 러시아철도공사 사장 야쿠닌과 한국철도공사 이철 사장 간 나진-하산프로젝트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또한 나진-하산프로젝트사업을 실현하기 위한 한-러 합작물류회사 설립을 목표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 한국 측 합작물류회사인 루코와 러시아철도공사간 합의였고 그로 인해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되었다.

 

나진-하산프로젝트의 초기 핵심사업은 부산-나진-하산-TSR 노선으로 연결되는 컨테이너 물류사업 실현이었다.

 

이를 위해 나진-하산 철도구간의 개보수(54km), 운송의 현실화를 위한 화차확보, 나진항 컨테이너 터미널의 개보수가 필요했다.

 

▲ 나진-하산프로젝트의 초기 핵심사업은 부산-나진-하산-TSR 노선으로 연결되는 컨테이너 물류사업 실현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54km에 달하는 나진-하산 철도구간의 개보수가 필요했다.  © 국토매일

 

우리측은 TKR-TSR 연계 컨테이너운송사업을 위한 한-러 합작회사 설립을 위해 러시아철도공사와 계속 실무협의를 진행했지만 국내외 상황이 좋지 못해 성사되지 못했다.

 

러시아측은 북한측과 이미 합의한 것이 있어 나진-하산 철도개보수와 나진항 컨테이너 터미널 개보수 등을 진행했지만 남북관계 단절과 동북아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으로 나진-하산프로젝트 사업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후 3년여 만에 나진-하산프로젝트는 복합물류 사업으로 재추진된다. 러시아 쿠즈바스라는 광산에서 생산된 유연탄을 러시아 하산과 북한의 나진항을 잇는 54㎞ 구간 철도로 운송한 뒤 나진항에서 화물선에 옮겨 실어 국내 항구로 가져오는 일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이미 포화 상태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의 대체항으로 나진항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고 북한은 철로 현대화라는 혜택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방향이면서도 우리 입장에서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으로 이끌기 위해 수차례 협의하며 구체화시켜 갔다.  

 

나진항을 이용하여 물류를 수송하려면 먼저 나진-하산 54㎞ 구간에 대한 철길을 개발하고 나진항 3호 부두도 만들어야 했다.

 

개발 운영권은 RCT에 있었는데 RCT는 나진항을 이용하는 물류 수송 체계회사로 회사 만들 당시 북한은 현금 대신 나항 부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러시아는 70퍼센트에 해당하는 현금을 투자하면서 합류하였다.

 

북한은 회사에 대한 권리를 러시아에게 2008-2057까지 49년이나 주었다. 2008년부터 작업이 시작된 이후 4~5년 동안 유지 개보수 등이 진행되면서 트럭을 비롯한 다양한 장비들도 함께 들어왔다. RCT건물도 번듯하게 들어섰다.

 

▲ 북한은 현금 대신 나진항 부지를 제공하고 러시아는 70퍼센트에 해당하는 현금을 투자하면서 합의하였다.  © 국토매일

 

여러 나라의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북한은 특히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잘했는데 나진은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의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러시아는 서쪽으로만 세력이 치우쳐 있기 때문에 동쪽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나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진항을 통해 나가야 하는 물량은 주로 유연탄이었다. 유연탄은 남한에서는 생산이 안되는 광물로, 열량이 높고 가벼워서 주로 호주나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기네 쿠즈바스라는 광산에서 생산되던 유연탄을 남한의 포스코 같은 업체 또는 제3국으로 수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 러시아는 쿠즈바스 광산의 유연탄을 남한과 제3국 등에 수출하면 좋겠다는 계산과 함께 동쪽 세력을 키우기 위해 나진이 필요했다. 나진은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의 가장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 국토매일

 

2013년 11월13일에 푸틴이 국내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푸틴과 박근혜 대통령, 포스코 회장 등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대한 MOU를 맺었는데 우리 쪽에서는 유연탄 사용업체인 포스코, 선박 물류 수송 경험이 있는 현대상선, 철도 전문기관인 코레일, 러시아 철도공사와 러시아 철도공사의 무역회사 등 5개 사가 함께 했다.

 

당시 러시아와 북한을 오가며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지용태님(현재 코레일 충북지역사업단 안전환경처장)을 만나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성사 배경부터 진행 과정 그리고 중단되고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해 온 여러 상황들에 대해 인터뷰 해 보았다. 

 

지용태님은 당시 한국철도공사 물류 계획처장으로 있다가 프로젝트성 업무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업무가 많아지자 추후 남북대륙사업처가 만들어졌고 코레일의 대표격으로 이 프로젝트의 전담이 됐다.

 

본격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이듬해인 2014년 2월부터였다. 북한에 현지 실사 등을 위해 방문한 횟수만 10여 차례에 이른다.

 

2월에는 약 5일간 머물면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남한도 러시아, 북한과 함께 지분에 참여를 했기 때문에 항만을 제대로 만들었는지 철도는 잘 깔았는지, 예산에 맞게 돈을 사용했는지, 해당 항목에 맞는 설비가 다 갖추어져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히 살펴야 했다.

 

조사 결과 북측에서는 국제협력처 같은 곳도 만들어 무척 적극적으로 훌륭히 실행한 것으로 보여졌다. 

 

▲ 남과 북은 대륙으로 뻗어 나갔던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대륙철도 운영 경쟁력을 확보하고 나아가 국제 포워딩 업무, 철도 항만 복합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자는 등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주고 받았다.  © 국토매일

 

이렇듯 남과 북은 대륙으로 뻗어 나갔던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함께 손을 맞잡았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통해 남북 및 대륙철도 운영 경쟁력을 확보하고 나아가 국제 포워딩 업무, 철도 항만 복합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자는 의견도 긍정적으로 오고 갔다. 

 

나진항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수위가 안정적이어서 해일 피해가 없다는 점, 대초도와 소초도라는 작은 섬 덕분에 파도가 거의 없다는 점 등 항만으로서의 장점도 매력이었다. 

 

남과 북의 철도 실무자들은 새롭게 시작된 나진-하산 프로젝트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나진항처럼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절대 경직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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